[전문가 칼럼] “USB 하나로 수십억이 빠져나간다”
이창길 (주)CnH 대표이사 / 한국영업비밀보호협회 이사
전고체전지 개발정보 200여 장을 빼돌리려던 이차전지 업계 관계자가 구속기소됐다. 반도체 대기업 전직 임원은 중국 업체로 넘어가 국내 기술로 D램을 개발하다 적발됐다. 2026년 들어서도 기술유출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유출에 가장 취약한 곳은 이름이 알려진 대기업이 아니라, 보안 인력도 예산도 없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다.
2026년에도 이어지는 유출 시도
지식재산처 기술디자인특별사법경찰(특사경)은 지난 2월 이차전지 기업의 해외 협력사 임원을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이 임원은 국내 연구원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전고체전지 개발정보, 제품 단가 로드맵, 음극재 개발 정보 등 약 200여 장의 자료를 넘겨받아 해외로 전달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 다행히 실제 해외 유출 직전 단계에서 적발됐고, 이차전지 분야에서 외국인을 구속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앞서 2025년 하반기에도 대형 사건이 잇따랐다. 12월에는 검찰이 중국 반도체기업 창신메모리(CXMT)로 넘어간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 관련자 10명을 기소했고, 10월에는 전직 임원·연구원 등 3명이 유출된 D램 공정 기술을 활용해 중국에서 D램을 개발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1월에는 삼성SDI 협력사의 배터리 부품 도면이 베트남·중국 업체로 넘어간 사건도 재판에 넘겨졌다.
이런 사건들이 쌓이면서 지식재산처는 지난 7월 기술유출·지식재산범죄 대응을 위한 전담 수사체계를 본격 가동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김동아 의원실이 지난 5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5년 6월까지 국가핵심기술 33건, 산업기술 105건이 해외로 유출됐고 누적 피해 추산액은 23조 2700억원에 달한다.
정작 더 위험한 건 중소기업
이런 대형 사건들은 뉴스가 되지만, 실제 유출 피해의 절대 다수는 중소기업 몫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4년 기술보호 실태조사(2025년 5월 공개)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연간 기술침해 건수는 약 299건으로 추정되고, 피해기업당 평균 손실액은 약 18억 2천만원에 달한다. 기술보호 역량지수는 중소기업이 평균 49.0점으로 대기업(74.5점)의 66% 수준에 불과했고, 전담 인력이나 보호 규정을 갖춘 기업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왜 중소기업·소상공인이 더 취약할까. 비즈한국이 지난 5월 다룬 분석 기사에 따르면, 법원이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비밀관리성’ 요건 미비다. 담당 직원이 회사 정보를 USB로 반출하거나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아도 회사가 그런 관행을 알면서 방치했다면, 정작 소송에서 비밀관리성과 비공지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기업처럼 첨단 기술을 엄격히 관리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국내 중소기업 대부분이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일단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부터
ZDNet코리아가 지난 8월 다룬 법률 인사이트 칼럼도 비슷한 지점을 짚었다. 영업비밀 침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응이 내용증명 발송이지만, 이는 의사표시를 공식화하는 절차일 뿐 실효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대비할 시간만 주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애초에 유출·침해가 발생했을 때 사실관계를 입증할 수 있도록, 평소에 정보를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기록을 남겨두는 일이다.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로 인정받으려면 ▲비공지성(공개되지 않을 것) ▲경제적 유용성(경쟁상 이익이 될 것) ▲비밀관리성(접근 제한 등으로 실제 비밀로 관리될 것) 세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이 중 소상공인·중소기업이 가장 쉽게 놓치는 게 비밀관리성이다.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문서에 ‘대외비’ 표시하기, 핵심 자료 접근 인원 최소화, 직원·협력사와 비밀유지 조항이 담긴 계약서 작성, 퇴직자 자료 반납·삭제 확인 정도만 갖춰도 최소한의 방어선은 마련된다.
한편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지난 1월 16일부터 시행에 들어가, 자료제출명령 제도가 구체화되는 등 기업 대응 수단도 조금씩 확대되는 추세다.
지원사업은 있지만, 닿지 않는다
한국지식재산보호원은 「2026년 영업비밀·기술 보호 컨설팅」 사업으로 중소·중견기업과 대학·공공연구기관에 단계별 컨설팅을 지원한다. 참여 인력 인건비가 지원돼 기업 부담 없이 보호원 소속 변호사·변리사가 직접 방문한다. 중기부의 ‘중소기업 기술보호울타리’는 기술보호 자가진단, 기술자료 임치, 분쟁 조정·중재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다만 이런 사업들은 아직 인지도가 낮다. 정작 도움이 가장 필요한 소상공인·1인 기업 대표들은 “영업비밀”이 법적으로 뭘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형 기술유출 사건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이, 정작 더 넓은 피해가 발생하는 현장에는 정보가 닿지 않고 있는 셈이다.